기증 전과 손기정 선수 청동 투구 백사 이항복 종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항복 선생의 종가 기증전이 열리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이항복 기증 전 어제에 이어 오늘도 비가 내렸다. 지하철 4호선 이촌역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다.

이촌역에서 내려 지하도를 통해 박물관에 이를 수 있다.

문득 경복궁의 향원정이 떠올랐다.

사회적 거리를 두는 것이 잘 지켜지고 있었다.

백사 이한복 선생의 연표다.

19세 때 권율의 딸 안동권 씨와 혼인했다. 25세 때 대과거제로 관직에 진출하였다. 36세에 도승지가 되었다. 37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를 시호하였다. 또 병조판서로서 군사행정을 담당하였다. 42세에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43세에 우의정이 되었다. 45세에 영의정이 되었다. 62세 때 인목왕후 폐비에 반대하기 위해 상소를 올렸다. 63세 때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왕은 빠르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신하와 절개와 위대한 업적이 나타난다 나라를 바로 세우는데 큰 공로가 있으니 글을 써서 공을 세우고 포상하는 것이 실로 큰 제사와 극진한 예다.이항복 임진왜란 때 임금을 의주까지 호종한 공로를 인정받아 호성공신 1등으로 만들겠다는 선조 임금의 교서이다. 당시 명필 석봉 한호韓浩(1543~1605) 선생의 것이다. 이항복이 일등공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역 가운데서도 유성룡의 이름이 눈에 띈다.

이항복의 초상 초상으로 17세기 초에 그려진 것으로 서울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이항복은 49세인 1604년 호성공신의 초상화를 수상했다. 백사 이항복 종가에 전해져 온 이 그림은 후대에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공신상은 후손이 소중히 보존하다가 초상이 낡으면 그림을 그려서 다시 모시는 것이 전통이었다. 이항복의 초상은 종가 외에도 화산서원을 비롯한 여러 곳에 봉안되어 있다.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호종한 공으로 인해 1613년 위성공신 1등이 된 58세 때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광해군의 공신은 인조 즉위 후 잃었으나 종가에서는 공신 초상을 소중히 보존하였다. 49세 때의 호성공신 초상화와 비교하면 흰수염과 주름이 늘고 턱선이 부드러워 화가가 노화의 흔적을 잘 포착했음을 알 수 있다.

58세 때의 위성공신 초상화와 49세 때의 호성공신 초상화 이항복이 6세의 손자 시중(1602-1657)에게 쓴 천자문이다. 붓으로 쓴 천자문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귀중한 유산이다. 해서로 한 자씩 정성들여 쓰며, 글씨의 골격이 단단하고 획이 날렵하다. 한자 밑에 한글로 쓴 음과 뜻은 조선시대 한국어 연구에도 도움을 주지만 누가 썼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늘의 천을 따서 검을 지혜롭게 하는 노랑, 하늘은 왜 검다고 표현했을까.천자문은 중국 위진남북조시대에 양나라 초대 황제 무제가 신하인 주흥사(470521)를 시켜 만든 책이라고 한다. 왕희지 선생의 행서 중 1,000개의 한자가 중복되지 않도록 선정되었으며, 4글자씩 총 125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자문의 말미는 어조서 「야」라고 한다.

천지 현황과 우주 홍황이 각각 한 문장과 두 문장이 합쳐져 한 문장이 된다. 250개 문장과 125개 문장으로 구성된다. 천자문은 1000개의 한자로 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천자문은 동아시아의 탄생과 발전과정은 물론 중국 고전의 정수를 담고 있다. 논어 맹자 시경 대학 중용 서경 주역 예기 사기 등 중국 고전의 정수를 담고 있다. 즉 천자문은 한자 1천자를 배워 익히는 것이 아니라 동양의 인문과 고전을 익히는 첫 번째 관문이라는 것이다.한정주 | 역사평론가 겸 고전연구가 ” 님의 글을 참조하였다.그런데 왜 하늘은 검은가? 인간의 시선이 닿는 하늘은 푸르지만 그 너머는 암흑의 세계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란다. 국립민속박물관 웹진 ‘민속뉴스’ 2017년 3월호에 이 글이 실려 있다.50세 된 노인이 땀을 닦고 고통을 참으며 썼으니 함부로 다루지 말라.

한호가 쓴 천자문과 이항복이 쓴 천자문. 그리고 책 뒷면에 쓴 당부의 말은 1607년, 즉 정미년 4월에 손자에게 써준 것이다.제사는 자신 밖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공경하고 예법에 따라 제물을 차리므로 현명한 사람만이 제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현자들은 제사를 지낼 때 자신의 경건한 마음을 다해 제물을 바치고 예절을 이끌어 음악으로 위로하며 계절에 맞는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신에게 복을 구하지 않는 것이 바로 효자의 마음이다. 제사는 빈번히 지내지 않는다. 자주 지내면 번거롭다고 공경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제사는 소홀히 하지 않는다 소홀히 하고 게으름 피우면 잊는다

이항복이 친히 지은 제례에 관한 문송시열이 중화의 대의를 우리나라에서 높이 받들겠다는 뜻을 밝혀 명멸망 20년 후의 글이다. 석봉 한호를 따른 견고하고 두터운 글씨체가 결의에 찬 내용과 잘 어울린다. 이한복은 후대 사람들에게 대의를 위해 생명을 불태운 인물로 기억된다. 송시열은 유배를 간 인목왕후의 유폐를 반대한 이항복의 헌의가 인조반정을 이끄는 기폭제가 됐다고 평가했다. 이한복의 유배와 죽음은 광해군이 조야의 신망을 크게 잃는 계기가 되었다. 이한복은 삶의 끝에서 옳다고 생각하는데 목숨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선비의 표상으로 오랫동안 기억되었다.

송시열이 쓴 존주대의 이항복은 인목왕후 유폐 반대를 이유로 탄핵되어 유배되었다. 1618년 63세의 병든 몸으로 함경도 북청도 유배지에 올랐다가 그해 5월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은 당시 이한복을 모셨던 정중신이 1617년 11월 1일부터 1618년 8월 7일까지 유배 전후 사장과 유해를 경기도 포천에 안치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남구만의 서문과 이인서의 발문을 담고 있어 이항복이 당나라를 넘어 후대 문인들의 존경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이항복이 북청으로 유배되었을 때의 기록이 항복은 서인에 속했지만 붕당에 치우치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나 광해군이 이이첨 등 대북 주도로 계모인 인목왕후를 유폐시키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헌의를 표했다. 이한복은 순임금이 자신을 해치려는 부모에게 효도한 고사를 광해군이 본받기를 바랐다. 그러나 대북세력은 이 글을 빌미로 이항복을 탄핵했고, 그 결과 이항복은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원익은 이항복의 헌의에 대해 극언으로 힘을 다해 중전하다가 마침내 머나먼 북쪽 끝에서 죽은 것을 생각하면 훌륭하다. 제가 한 말을 실천한 분이라고 존경을 표시했다.

이항복이 광해군에게 올린 대비를 폐하자는 데 대한 글이 이항복은 임진왜란 초기부터 명조 지원군의 요청을 앞장서서 주장했다. 조선명연합군은 1593년 1월 고니시 유키나가가 점령한 평양성을 공격해 되찾았다. 임진왜란은 일선에서 싸운 무신은 물론 이한복을 비롯한 문신들의 외교가 있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이 병풍은 도원수 김영원 휘하의 조선군과 명의 이여송의 군대가 힘을 합쳐 평양성의 서북쪽을 공격하는 장면을 재현한 것이다.

평양성 탈환 전투

성시정 선생님이 기증한 그리스 투구가 있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역주하는 손기정 선생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하면서 받은 투구가 전시돼 있다.

성문종합영어 저자 송성문 선생이 기증한 문화재가 있었다. 대보적경을 비롯한 4건의 국보와 묘법연화경 등 22건의 보물을 기증했다.

부모는 충칭.

경국대전

봄가을에 다시 가야지. 김홍도 선생의 풍속도첩도 놓쳐서는 안 된다.

전시회 구경을 마치고 나오니 비가 그쳤다. 서울타워의 모습도 또렷하다. 멀리 있는 산이 북한산인가?

프랑스 파리의 라테판스가 생겨났다.

못은 크지만 정말 경복궁의 고장 원정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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