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유토브를 보다가 배호씨가 궁금해서 알아보니 대단한 사람이었던 그는 그저 그동안 유명한 뽕짝 가수들 중 대중의 인기를 많이 받는 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그는 그렇게 오래된 가수가 아니라 이미자 씨보다 한 살 아래, 김상희 씨보다 한 살 아래인 조영남 씨보다 세 살 아래인 나훈아 씨보다 다섯 살 위인 1942년 중국 산둥 성 지난에서 태어났다.
배호(1942년 4월 24일1971년 11월 7일)의 본명은 배만금이며 중학교 1학년 때 배신웅으로 개명했다. 1945년 해방 후 부모를 따라 귀국 후 경기 인천시의 한 수용소에서 생활하다 1946년 4월부터 서울 창신동 적산가옥에 머물렀다.서울 창신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삼성중에 입학했으나 대한광복군 중사 출신인 아버지가 1955년 타계한 뒤 1956년 중학교 2학년으로 중퇴했다.너무 가난해 외삼촌 김광수 씨의 소개로 악단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숙식을 해결했고 외삼촌(김광수)에게서 드럼을 배우며 지냈다. 삼촌 김광수(1957년부터 1964년까지 서울중앙방송악단장, 1964년부터 이듬해 1965년까지 TBC동양방송악단장), 그리고 김광빈(MBC문화방송초대악단장)악단, 김인배(동화, 천지, MBC악단)악단 등으로 드럼을 연주하며 음악활동을 시작했고 12인조 ‘배호와 그 악단’밴드를 결성해 단장을 맡았으며, 서울 낙원동의 프린스 카바레로 활동했다.
본격적으로 가요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63년(쇼와 38년) 예명 하이호로 데뷔해 굿바이 사랑의 화살을 발표하고 1964년(22세)1965년(23세) 데뷔곡 산골 등 6곡을 발표했다.1966년(24세) 신장염을 앓아 황금의 눈 및 홍콩 66번지를 발표했고 1967년(25세) 라규호 작곡 누가 울어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람을 병상에서 발표해 대박을 터뜨렸다.그때 유행한 노래로는 지금까지 간간이 불리는 남진의 <가슴 아파>가 있다.이후 1967년 배상태가 작곡한 돌아가는 삼각지를 발표한 뒤 부르는 노래는 모두 공전의 히트를 쳤다.1971년 7월(29세) 마지막 잎새 연시의 이별 등 마지막 앨범을 발표했고, 1971.10월 라디오 이정환의 밤 출연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맞으며 감기에 걸려 신장염이 재발해 병원에 입원했으나 1971년 11월 7일 사망했다. 당시 그는 만 29세로 미혼이었다.가수 생활 5년 동안 음반사 10여 개사에서 20여 장의 음반을 발매해 200여 곡을 남겼다.그가 불러 히트시킨 노래는 도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공원,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람, 비 내리는 명동 거리, 엽서 한 장, 울고 싶어서 누가 울고 마지막 잎새, 영시 이별, 파도, 검은 눈동자, 결혼각서, 막차로 떠난 사람, 안녕 역에서 가로등, 잊을 수 없는 여인, 초가삼간, 울면서 떠난 사람 등이 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가수들이 마이크 앞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그의 창법은 소리내게 노래하고 선배로부터 건방지게 노래한다는 욕설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그 당시에는 드물게 (최근 들어 조용필 같은) 온몸으로 간절히 노래를 불러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그는 가요 초반부터 이어져온 뽕짝(트로트) 가수가 아니라 새로운 음악의 세계를 개척한 드러머로서 다양한 리듬의 팝송까지 노래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가수이며 목소리도 저음과 고음 영역에서 적당한 바이브레이션이 있는 희귀한 가수였기에 지금도 그의 노래는 듣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평소 지병이 있어 몸이 피곤할 때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무대에 서야 할 때 의자에 앉아 대기하며 노래를 불렀으나 병세가 악화됐을 때 의자에 앉아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누워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그는 어머니에게 “어머니! 아플 때 노래를 하면 관객들이 더 좋아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우리는 잔인하게도 그의 아픔 속에서 절규하듯 부르는 노래를 듣고 환호했는지도 모른다.단기간에 그렇게 많은 노래를 도입해서 유행시킨 가수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