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천 유림의 산실 서원을 찾아서!오늘은 화산서원을 소개하겠습니다.유재슬 기자가 소개할 화산서원에 가보겠습니다.한국 포천 역사에서 두드러진 인물은 아무래도 오성과 한음일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뛰어난 정치인이고 학자이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대부였다. 그 두 사람을 모신 서원이 포천에 있으니 바로 오성 이한복 선생을 모신 화산서원, 그리고 한음 이덕현 선생과 용주 조경 선생을 모신 용연서원이다. 여기에 청백리로 이름난 조상 때 영의정을 지낸 사암 박순 선생을 모신 옥병서원까지 더해 우리 포천에는 총 세 곳에 현존하는 서원이 있는데, 오늘은 그중 화산서원을 먼저 찾아본다.
서원의 시작되어 태조 이성계에 의해 조선왕조가 창업되면서 조선의 인재를 키우는 지방의 교육기관으로는 고려 후기부터 내려온 향교가 먼저 정착되었고, 이어 중기 들어 서원이 그 뒤를 이었는데 향교가 관이 주도하는 교육기관이었다 하여 서원은 일종의 사학교육기관이었다. 조선 중기 중종 때 경상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이 훗날 퇴계로 인해 국가로부터 ‘소수서원’이라는 최초로 사액을 받은 이래 상당한 숫자의 서원이 전국 각지에 건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두 기관이 도성이 아닌 지방에 있어 실질적인 교육기관으로서의 양대 산맥이었던 셈이다.꽃뫼화봉산에 위치한 화산서원

ⓒ시민 기자 유재술 화산 서원은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 산16-1에 위치한다. 처음에는 수원산 아래 옥금동에 사우를 지어 백사서원으로 불렸으나 나중에 지금의 자리로 옮긴 뒤 사액을 받아 ‘화산서원’으로 고쳐 불렀으며, 그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시민기자 유재술서원을 들어가는 입구에는 궁궐이나 왕릉에서 볼 수 있는 하마비가 있는데 이곳이 매우 신성한 곳이므로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뜻이다. 그 내리는 지점도 품계에 따라 각기 다른 거리를 표시하고 있는데, 1품 이하는 궐문에서 10보, 3품 이하는 20보, 7품 이하는 30보 거리에서 말에서 내려야 한다.대개 궁궐이나 왕릉 등에서 볼 수 있으나 서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간혹 사찰에서도 관찰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서원에 하마비가 있다고 해서 틀림이 없다.

ⓒ시민 기자 유재술 하마비 다음에는 백사 이한복 선생의 덕행을 숭상하는 신도비가 서 있다. 백사 이한복 선생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선조 13년 문과에 급제하여 북조 조감의 동승지 등의 관직을 거쳐 병조 판서와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당쟁 조정에 힘쓰다가 나중에 청렴한 관리로 청백리로 추대되었다. 백사 이한복의 후손들은 조선 시대에 많은 정승을 배출한 집으로 유명하며, 이시영, 이회영 등 많은 인물이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에 많이 기여하였다.


ⓒ시민기자 유재술을 조금만 걸어가면 홍살문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는 역시 성현을 모신 사당이니 근엄한 마음으로 경내에 들어가라는 뜻이다. 홍살문을 좌우에 두고 민가가 양쪽에 있는 길을 조금 오르면 세 개의 태극 문양을 한 외삼문과 그 뒤에 단청을 칠하지 않은 건물이 두 채가 양쪽으로 보인다.

ⓒ시민 기자 유재술이 외삼문 처마와 문 사이에는 화산(華山)이라는 이름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곳의 지명에서 유래되었음을 알린다. 예전에는 순우리말로 ‘꽃뫼’라 하였으나 지금은 화봉산이라 더 많이 불리는데, 이 역시 지명과 관련되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외삼문으로 들어가는 데는 작은 규범이 있다.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 하여 ‘사당에 모셔진 분이 볼 때 경내에 들어오는 사람은 동쪽으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간다’는 개념이다.

ⓒ시민기자 유재술 외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낮은 언덕에 다시 삼문이 보이는데 내삼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좌우에 동서가 있다. 왼쪽에는 필운재라고 적혀 있는 현판이 걸린 동재가 있는데, 이는 선생이 한양에 살던 시절 마을 이름이 필운동인 데서 유래한다.

ⓒ시민 기자 유재술의 오른쪽에는 동강재라고 적힌 현판이 있는데, 이는 서재로서 선생이 조선왕조 최고의 관직인 일일하만인지상의 영의정 관직에서 물러나 살던 사우의 지명이다. 영의정 관직에서 물러나면 곧바로 향리로 내려갈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최고 관직에 있던 자가 향리로 내려가 세력을 규합해 불순한 음모를 꾸밀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왕의 심저에 내재된 조치였다.필운재와 동강재 양쪽 현판 글씨는 이 서원을 복원할 때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 나라 최고의 재벌기업을 창업한 삼성 고 이병철 회장의 글씨로 알려졌다. 두 건물의 용도가 각각 따로 용도가 지정된 것은 아니며 때로는 강학과 토론이 오가 간혹 손님을 맞이하여 빈객의 예를 표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다른 서원과 달리 강당이 없어 동재와 서재가 이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시민기자 유재술자, 이제 내삼문으로 들어가 보자. 긴 장대석으로 3열 계단을 만들어 3단으로 언덕을 따라 쌓은 기단 위에 내삼문이 세워져 있다. 내삼문의 태극 문양은 신이 들어가는 가운데 정문에만 배치되어 있는 것이 외삼문의 그것과 또 다른 듯하다.

ⓒ시민기자 유재술 초현문이라는 이름을 통해 이미 이 건물의 용도를 알 수 있다. ‘성현을 초대한다’는 뜻이므로 높은 학식과 세상을 경영한 정치인으로서의 경륜과 덕망을 갖춘 사람이 이곳에 모셔져 있음을 알 수 있도록 한다.

ⓒ시민 기자 유재술 다시 동쪽으로 들어와 성현을 모시고 있는 인덕전이 있다.현판은 화산서원(華山書院)이라 하고 작은 글씨로 현종경자 사액이라 하였는데 아마도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닌가 싶다. 현종 때 경자년에는 즉위 이듬해인데 이때 화산서원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효종편 10년 윤3월 28일자 기사에 따르면 이항복을 제향하는 서원의 액호를 화산으로 내리도록 명령했다고 기술돼 있어 이때 왕의 명에 따라 사액됐음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시민기자 유재술 백사선생님을 모신 서원은 전형적인 미배지붕으로 둥근 모양의 방풍판과 이 박공나루를 지지하는 접이판의 형태가 매우 특이하다. 유사 건축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 같다.

ⓒ시민기자 유재술, 시민기자 유재술서원 뒤로 돌면 다소 넓은 빈 공간의 잔디밭에 둥근 모양의 히메무덤 같은 봉분이 눈에 띈다. 15대 화산서원의 원장으로 취임하여 이 서원을 총괄하는 류금열 원장의 말에 의하면 고종이 즉위하여 섭정을 하던 흥선대원군이 일부 흐트러진 서원의 폐해와 국가 재정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전국적인 서원 철폐령이 내려졌을 때 이 화산서원도 폐원되었다고 한다. 이때 백사 선생의 위패를 이 땅에 매장하고 제사를 유림들이 지냈다고 한다. 서원은 철폐되었으나 훗날 이곳에 서원을 복원할 때 그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시민기자 유재술 서원 뒤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훌륭하다. 멀리서는 선생님의 무덤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어 향리에 묻힌 선생의 육체와 정신이 서로 소통하는 듯하다.

ⓒ시민기자 유재술자, 이제 서원 안으로 들어가 보자. 건물 안에는 그리 화려하지 않은 색의 단청이 들어간 내부의 모습이다.


ⓒ시민 기자 유재술 매월 보름 분향을 하는 제단과 선생의 위패를 모신 신주, 그리고 영정을 모신 폐쇄옥이 있다. 위패는 밤나무로 만들어 보존되어 있어 근엄하다는 느낌보다는 자애에 가까운 선생의 영정이 있고, 영정과 위패 위에 광해군 시대에 선생이 빈소로 인목 대비 폐모 불가에 대한 헌의를 올린 친필초가액으로 걸려 있다.

ⓒ시민기자 유재술의 어떤 당쟁에도 휩쓸리지 않는 탁월한 경륜의 정치인이었던 선생은 결국 이 헌의 한 장으로 중풍에 걸린 몸임에도 아득한 함경도 오지 북청으로 귀양되어 지내다가 1년도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돌아가게 되는데 귀양 중에도 후학들을 교육하는 등 후진 양성에 힘쓰고 그 뜻을 기리고자 유생들이 그 북청이라는 곳에 선생을 모신 서원이 있었던 것이다.사실 서원이 철폐되는 순서는 첩설, 즉 같은 위인을 두 곳에서 중첩해서 모셨을 때 폐원되는 것이 우선이었다. 철폐령이 내려졌을 때 노덕서원과 화산서원의 대표자들이 타협할 것을 포천에는 선생 묘소가 있는데 북청에는 선생을 기릴 만한 아무것도 없으니 북청 노덕서원을 존치하고 포천의 화산서원은 철폐에 응하겠다고 이에 화산서원이 동의했고, 그래서 없어진 것이지 화산서원 자체가 어떤 폐해의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시민기자 유재술 처절한 그 왜구들과의 7년의 긴 전쟁이 끝나고 공신의 책록이 있을 때 선생은 국난을 극복한 공이 크게 인정되어 호성 1등 공신에 봉해지자 사후 선생의 시호를 문충공이라 하였는데, 문신의 최고 영예는 문(文)자로 시작하는 시호였고, 무신에게는 충(忠)이라는 시호가 최고의 영예이므로 문충공이라는 시호는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존망의 시기에 이를 극복한 선생의 큰 공을 인정받아 문무 모두에게 내려졌다.이제 인문학이 각광받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 역사와 포천의 역사를 돌아보며 반정의 빌미를 제공한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북청으로 유배되면서 지은 그의 그 유명한 시조의 구절을 원문으로 읊고 이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철령 높은 재에 누워가는 저 운아고 신원루를 비로서 띄워 가 고객이 있는 옛 중심처에 뿌려본 곳으로.참고자료 – 포천군지 1997년 발행, 화산서원 자료제공, 조선왕조실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