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 명단에 내가 있다. 뛰어나게 승진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 승진한다, 할 때가 됐다, 축하받는 것도 어색한 승진이다. 그래도 승진 명단을 눈으로 봐야 진짜 승진 아닌가. 다행이다. 지금 나는 사무실 막내이다. 문 끝에 앉아 있다. 모두 내 뒤를 스치듯 지나간다. 누구나 그렇듯이. 힐끗 내 모니터를 본다. 보고서를 쓰는지, 결재를 상신하는지, 메신저를 쓰는지, 카카오톡을 하는지 슬쩍 본다. 정확히는 보인다. 모든 과원이 내 모니터를 본다는 건 왠지 내가 휘청거리는 느낌이다. 직급이 낮아서 업무는 어쩔 수 없는 손을 써도 내 자리가 너무 싫다. 이제 이 자리도 바이바이다. 훗.
곧 보직 명령이 떨어졌다. 막내 자리도 안녕이다. 문 손잡이 위치도 안녕. 새 사무실에 인사해야죠. 흔쾌히 저를 받아주셨으니 인사는 가야 한다. 새 사무실로 가다.사무실 형태는 조금 다르겠지만 배치는 비슷할 것이다. 기대된다 사무실 문을 열었다 몇 사람이 나를 쳐다본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발령난 고길동 주무관입니다. 인사드리러 왔습니다.네, 당일 와도 되는데 이렇게 오셨네요.인사도 하고 제 자리도 보려고 해요.”
과장님 인상이 참 좋네요. 같이 일하는 사무관과 셋이 믹스커피 한잔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내 자리는 서무사무관 옆자리야. 서무라인과 과장 책상 사이에 낮은 서랍이 있다. 과장님이 우리 자리로 바로 올 수는 없지만 일어서자마자 우리 모니터가 보이는 그런 자리다. 사무관 한 사람만이 내 뒤를 지나간다. 과원 10명이 내 모니터 뒤를 지나는 지금과 비교하면 승진을 실감할 수 있다. 정말 승진이란 좋은 일이야.
근무하던 사무실을 떠올리면 사무실 형태는 달라도 자리 배치 철학은 같았다. 사실 철학이란 것도 없다. 승진하면 창가로 한 칸 간다. 또 승진하면 한 칸 더 나아간다. 창가가 전망이 좋지만 그게 이유는 아니다. 자리 배치의 철학적 이유는 그 자리를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도 그 사람의 모니터를 볼 수 없고, 따라서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과장 자리에서 먼 창가 자리라면 최고의 자리일 것이다. 새 사무실 과장 자리는 사무실 끝 낮은 서랍 뒤다. 낮은 서랍을 돌아 회의 테이블을 지나야 과장 모니터를 볼 수 있다. 과장 빼고는 볼 수 없다는 얘기다. 사무실에서 모니터할 수 없는 가장 어려운 자리가 과장 자리다.
창가에 한 칸 한 칸 가보면 결국 창가에 도착한다. 도착하면 어느덧 중년이 된다. 그리고 더 열심히 승진해서 과장이 되면 회의 테이블 뒤에 책상을 배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으면 국장이 돼서 내 사무실을 배정받을 수 있다. 창가 사무관들을 보면 조금 가슴이 아프다. 창가로 한 칸 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보고서를 썼고, 얼마나 많은 야근을 했을까. 나도 창가에 앉으려면 선배들의 길을 지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장님이 서랍에 자주 기대서 그러신다. 하필이면 내 모니터가 보이는 곳이다. 정식 출근하면 일단 화분부터 좀 사야겠어. 낮은 화분을 서랍에 올려두면 좀 낳을 거야. 제 자리도 살짝 가리고 과장도 푸르름에 가려 아늑함을 느낄 수 있다. 과장님이 좋아하실지도 몰라.
‘고길동 주무관’ 센스 있네 이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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